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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일러 표지 뽑는 노하우

일러.. 그거슨 작가가 맞는 정맥주사

잠은 안 오는데, 일은 하기 싫고 글도 쓰기 싫어서 끄적여 보는 표지 이야기. 


글이라는 본업을 제외하고, 부가적인 일 중에 작가를 가장 광분하게 만드는 게 역시 표지가 아닐까. 존 어빙은 말씀하셨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의 메인라인을 히트하는 거라고. 말하자면 정맥주사로 마약을 놓으라는 거다.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는 중독자가 되어 '작가님, 제발 다음 편 주세요. 텤마이머니, 하악하악'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 근데 나는 표지 만들 때마다 이런 식으로 메인라인을 히트 당하는 느낌이다. 온건하고 상식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교양인임을 자부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홱 돌아버리는 레벨의 원시적 광분에 휩싸임. 작가에게 표지야말로 정맥주사 아닐까. '다 틀렸어, 난 안 될 거야' 이러고 뒤굴거리다가도 러프 받아 보면 삶의 의욕을 되찾고, '담당자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흑흑'거리다가 A급 일러레 붙여 주면 역시 너밖에 없다며 충성맹세를 하게 만드는. 아무튼 정맥주사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결국 수정을 거쳐 맘에 드는 완성본을 뽑아 내니까,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우면서 신작 스토리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려 나온다.  


그럼 이런 표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출판사에 따라 가이드 양식을 주는 곳도 있지만, 내가 계약한 곳은 특별한 양식이 없었다. 그래서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주섬주섬 실마리를 던져야 했던 첫 표지. 러프는 마치 내 속에 들어왔다 간 것처럼 뽑아서 '엉엉, 금손님' 이라며 찬양했으나 색을 입히자 절망의 구렁텅이로 변한. 내가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어떻게든 심폐소생으로 살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중요한 건, '이 느낌이 아니예요, 뭔가 좀 더 강렬한 느낌적 느낌?' 이따구 처방으로는 내 새끼를 구할 수 없었다. 


일단 표지 제작을 위한 일러레 컨택은 빠를수록 좋다. 기본이 2~3개월이고, 금손 네임드의 경우에는 1년까지도 기다릴 수 있음. 갓작가님의 경우에는 아예 계약 당일 일러레 컨택 및 계약부터 요청한다고도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조율하는 게 표지 협의라고 하니, 그 업무 강도의 빡셈은 익히 짐작이 가는 수준. 본업인 작품 발굴 및 검토는 고사하고, 심지어 갑오브갑 플랫폼에서 프모 따내는 것보다도 표지가 더 어렵다는 거잖아.. 절레절레.. 하긴 다들 정맥주사 맞은 기세로 날뛸 거 생각하면 ㅋ 


평소 다른 작품들 표지 보면서 참고용 이미지 저장하고, 원하는 일러레 목록을 확보하는 게 유리. 표지 협상은 작가가 희망하는 일러레 리스트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냥 두면 출판사에서 들이미는 사람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그 결과는 뭐 이하생략. 나한테 방향성이 없으면 끌려간다. 끌려가다가 정신 차려보면 이 산이 아니지만 방법이 없다. 처음부터 3~5명 정도, 내가 원하는 일러레 후보 목록을 건네면서 시작하는 게 좋다. 


출판사를 통해 일정이 맞는 사람이 정해지면, 그 다음은 가이드 작성.  

* 전체적인 분위기 ex. 어둡고 강렬하게 / 밝고 따듯하고 샤방샤방 

*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 분위기 파악하는 차원에서 3~4줄 요약 

* 등장인물: 기본 2인으로 가격 책정하고, 하나 빠진다고 금액이 줄지 않지만 추가 인물이 들어가면 그때마다 비용 상승. 삼각관계여서 3명을 원하면 여기서 또 한판 줄다리기를 해야 함. 

* 인물들 외모: 머리스타일, 나이, 신장, 의상, 작품 내 외모 묘사한 부분 발췌. 

* 구도 ex. 상반신 위주로 타이트하게: 구체적인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과 분위기. 말로 길게 설명해도 아리까리할 수 있으니 졸라맨일지언정 스케치를 대강 그려 보내는 게 좋다. 

* 배경: 계절, 시간, 상징적 배경 등 

* 주의사항: 해당 작가의 트위터나 블로그 가서 전작들 포폴을 쭉 보면서 내가 원하는 느낌의 감을 잡는다. ex. A작처럼 은은한 느낌으로 해 주세요. B처럼 얼굴에서 광나는 인조적인 느낌은 지양해 주세요. 

 *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참고용 이미지 무더기: 의상, 머리스타일, 소품, 전체적인 분위기.. 이미지화에 참고한 연예인 등이 있으면 그 실사 사진까지. 


이렇게 월동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박박 긁어 보내고 기다리면 러프가 온다. 이 단계에서 자세를 다시 논의하고, 소품은 뭘 넣을지 뺄지 결정. 다시 기다리면 최종 버전이 오는데.. 여기서부터는 디테일 싸움이다. 기본적으로 상대는 이미지 전문가고, 나름의 전문가적 프라이드를 담은 결과물을 보낸다. 어설프게 입을 떼 봐야 수정 요청이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이쯤 되면 혁신적인 변화도 불가능하다. 수정 요청은 1~2회 안에 해결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주 꼼꼼히 연구하고, 분석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조언도 구하는 게 좋다. 


가령 "여자 같이 여리여리한 느낌이 싫어요. 강단 있게 해 주세요." 이런 주문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 없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고, 괜히 손 대서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대편에서는 나를 설득하려 한다. 어떤 요소 때문에 내가 불만족스러운지를 면밀히 살펴서 정확하게 요구해야 함. "눈 밑에 음영이 너무 짙어서 병약한 느낌이 드니까 좀 연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눈썹이 너무 뽑아서 다듬고 그린 것 같으니까 두껍게 해 주세요. 눈썹 앞머리는 털결이 살아 있는 느낌으로 터치감을 넣어 주시고요. 목젖을 부각해 주세요." 라는 식으로. 수정 원하는 부분을 따로 잘라서 빨간펜으로 번호 매겨 가면서 '여기'라고 정확히 짚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타협도 필요한 듯. 완벽하면 좋겠지만 인간이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럼 뭐 내 글은 완벽한가? ㅎ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려놓을 건 내려놓는 게 여러 사람 정신 건강에 좋음. 광분해서 열댓개씩 줄줄이 수정 사항 쓰면 - 심지어 대세에 지장을 안 주는 자잘한 건들 - 그쪽에서도 좋은 맘으로 받기 어렵다. 진짜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만 3~4개 추려 보내는 게 효율적. 


[마지막 팁]

1. 얼굴에 점 같은 미미하고도 나만 신경 쓰이는 요소는 생략하는 편이 나음. 가령 이번 주인공 얼굴에 눈물점이 있는데 그게 표지에 안 나와서 수정으로 추가했으나, 핸드폰 화면에 먼지 붙은 것 같아 자꾸 닦게 되는 결과를 초래.. ;; 결국 다시 지움. 글에 나온 묘사랑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표지로서의 기능 - 얼마나 시선을 잡아끄는가 - 전체적인 분위기와 조화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2. 텍스트보다는 이미지가 많을수록 좋다. 상대는 비주얼 전문가니까. 주구장장 대하소설로 저의 캐릭터는 이런 아이입니다, 소개해본들 내 간절한 마음처럼 열심히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진은 누가 봐도 똑같으니까. 머리 스타일 이 사진처럼 반묶음으로 해 주시고, 대례복은 이 사진을 참고해 주세요, 라고 하면 명확하다. 다만 인물 사진을 보낼 때는, 이 인물의 어떤 점이 중요한지 명시해야 함. 이 인물에서 턱선을 살려 주세요, 라고 딱 짚지 않으면 엉뚱하게 하얀 피부와 유약한 분위기를 구현할 수 있다. 

3. 조언을 구할 네크워크가 필요하다. 내 거라고 생각하면 맑은 정신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움.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자꾸 생각할수록 혼란만 가중. 이번 표지는 동료 작가 두 분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일반인 친구들에게 보여 줬던 첫 표지보다 훨씬 알찬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표지는 출간하는 순간까지 보안이 유지되야 하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공개해야 한다. 담당자 역시 업계의 전문가니까 그 의견을 경청하되, 그림 작가와 나 사이에 낀 입장이 있고 일이 많아지면 피곤하고 등등의 사정을 고려해서 선택적으로 수용해야 함. 결국 내 작품의 얼굴이다. 최종 결정은 내가 내리고, 그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글 쓰고 꿈 꾸는 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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